나는 겪었으니까 이야기해도 된다


  어제 저는 회사에서 늦게 퇴근을 했습니다. 다음 날이 연차이면서 아침부터 해야할일도 많고 회사 일이 끝나고 저녁에 바로 집에가서 정리해야할 일도 많이 있었지만 그 늦은 퇴근의 사유를 너그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한 그런데 그 이유가 내가 예전에 겪었던 일과도 관계가 되어있었던 사건이었기에 그 일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죠. 제가 예전에 겪었던 그 사건은 사기로 접수가 되었고 당국의 조사가 지금 중지된 상태인데요. 그 때 당시 절박했던 심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제 저와 접했던 그분의 심정이 너무나 잘 이해가 되서 다른 사람이 보기엔 미쳤다고 생각할지라도 저는 그 분에게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바로 보이스 피싱에 당한거죠. 실제로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 보이스 피싱을 당할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한 경험을 겪기가 정말 힘든것도 사실인데 그 일을 겪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할 수도 있으시죠. 거기에서 저는 어떠한 선을 발견하기도 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 선이란 안보이는 선으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주파수가 지구의 어떠한 흐름에 움직인다는 것인데요.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분명 사람마다 안보이는 잠재력을 폭력적인 성향으로 분출하게 만드는 코드와 동일한 것이죠. 영화 어벤저스 울트론에서 헐크에서 스칼렛 위치가 헐크에게 최면을 걸게되고 분노를 주체를 못하여 헐크버스터와 도심 한복판에서 사건이 일어났던 장면 기억하시죠. 영화긴 하지만 그게 실제 우리 일상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캡틴 아메리카에 나오는 버키 반즈가 세뇌당해 어떤 불안한 기운을 증폭시켜 이성을 잃게 만드는 코드가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보았을 때 '그게 가능해?' 라는 물음을 가지게 됩니다. 실제 영화를 봤을때는 말도 안되는 소리다라는 생각을 저 또한 했었으니까요. 그 영화를 보기전에도 그 현상이 제게도 인생에 있어서 일어난 적이 실제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상이 제 인생에 나만의 죄라고 생각하고 살았으니까요. 캡틴아메리카 시빌워의 쿠키영상에서 버키반즈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에 스스로 와칸다의 기술력을 동원해 냉동인간이 되기로 합니다. 세뇌로 인해 자신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 두려움때문에 그 증상을 회복할 수 있는 연구가 되어 자신을 고칠 수 있을때까지 자기 스스로 감금시키게 끔 하여 조치를 취하는 것이죠. 이것은 자신의 선의 의지이며 저 또한 그 선의 의지로 인해 현재는 그 감정증폭선에 대한 두려움에 적응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벤저스 인피니티워에서 버키 반즈는 냉동인간에서 해제되어 다시 나타났는데요. 이것은 우리의 인생이 이러한 삶의 답을 찾는 과정이 이미 정해져있다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어제 있었던 그 일이 제게는 지금의 제가 성장을 했다는 그러한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겪은 피해 사건의 끝이 아직 나지는 않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선 크게 의미를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건을 끝내냐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말이 옳고 그른 것을 확인하는게 중요하다고 하는데 저는 그 사건을 제 인생에서 정리하는 것이 큰 숙제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어제 일어났던 그 사람과의 대화 이전에 직장상사님의 말이 불현듯 떠오르더라구요. 자신이 예전에 이런 경험을 했었으니까 이 경험에 대해 훈수에 대해 이야기해도 된다. 자기는 훈수를 둘만한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한 경험을 통해 나아진 것을 겪었다는 이야기인 것이죠. 나는 잘난 사람이 아니다만 길을 찾았고 그 길을 통해 지금의 내가 됐다. 라는 겸손한 표현이었죠. 뭔가 자신이 약하다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표현이 진심을 느끼게 해주긴 하지만 반대로 자신에게 안좋은 기운을 끌어모으기도 합니다. 바로 나는 겪었으니까 이야기해도 된다라는 말처럼이요. 그런건 원래 없거든요. 제 직장상사이긴 한데 힘들게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머리속에서 잘못된 증오를 하긴했지만 어느정도 시기가 지나면 서로를 이해하겠지 하면서 지냈었지요.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사람의 불행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건지 이해하기 시작됐습니다. 그저 알고 있다면 미안하다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게 가장 도와주는 일이라는 것을 이번 일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굳이 삶의 레벨을 따지고자 하자면 산모의 고통을 넘어선다는 것이죠. 제 직장상사는 집에서는 어머니이기도 하니까 그 분이 겪을 최고의 고통은 산모의 고통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고통이 이세상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자신의 감정을 일시적으로 최고치로 증폭시켜 감정의 가장 낮은 단계까지 진입하게 되었던 그런 경험을 하게 된것이죠. 이건 사람마다 겪게될 삶의 레벨이 다른 것이라고 보이기도 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구분되듯 삶의 레벨이 높고 낮은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죠.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경험이 있는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이 나의 레벨과 맞든 안맞든 배워야한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나에게는 오히려 역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것은 집착을 낳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는데 2학년이 될때쯤에 다시 초등학교 1학년 공부를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죠. 중학교 1학년때 수학을 배우는데 집합을 처음에 배우기 시작합니다. 고등학교1학년때도 집합을 배웁니다. 고3때 수능 준비할때도 집합부터 공부하기로 합니다. 이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학을 못하나 봅니다. 저는 모두가 수학을 포기한다는 중학교2학년 때 그것을 극복하기위해 A 반 빼고 나머지 3반은 모두 동일한 등급으로 보는데 그 A반으로 들기위해 노력했었고 그 노력으로 A반에서 수업을 받았었죠. A반에 든다는 것은 수학을 잘한다는 뜻과도 같았습니다. 수학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죠. 재미가 있었고 그것을 아는데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는 어떤 승부욕이 있었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생활까지 수학은 내게 이로움을 가져다 주기도 했었죠. 분명 다른 과목은 성적이 안되는데 수학이 잘나와서 문과에 상위권반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시험의 결과는 항상 그 반에서 뒤에 있었긴 하지만 전교로 치자면 중상위정도까지는 들었었죠. 제가 그닥 공부를 잘한 건 아니었습니다. 항상 이상한 과목에서만 점수를 높이긴 했었죠. 문과인데 수학에서 점수를 잘맞거나 제 시절이 수능 과학폭탄이었는데 과학을 대충 감으로 풀었는데 등급이 2등급으로 나왔다거나... 이런 일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가 공부를 하는건지 모를정도로 사람들은 이 실적을 인정하는 곳이 있지만 굳이 좋은 길로 갈 수있는 루트는 아니었으니까요. 내게 세상을 읽는 코드가 노력으로 인해 어떠한 과목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이제는 그 노력을 자연스럽게 내게  오는대로 받아드리는 것을 해보니 두려움이란 것이 나 자신을 그대로 두려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조금 더 공부하게 되었죠. 누군가를 책임지겠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 책임을 진다는 말이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중요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그 말을 하지요. 나쁜 일이 일어나지만 않으면 되니까 말이죠. 나쁜일이 일어날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나쁜 일 비스무레한게 일어난다면 말이 좀 달라집니다. 나쁜일 비스무레한 일이 일어났을때 그 일에 대하는 태도가 이겨내야하는 일이다, 아니면 그대로 흘러가게 만들어야한다는 두가지 시선으로 봤을 때 처음은 나쁜 일에 대한 감정을 그대로 안고가자는 뜻이고 뒤에는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의 감정에 의미룰 두지 말라는 것이었죠. 동상이몽이라고 같은 공간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게 바로 사람입니다. 쿨하게 일을 넘기자고 해도 어떤 사람은 그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죠. 사람인지라 기억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 기운은 어떻게든 어떤 계기로 인해 에너지가 증폭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물흘긴다' 는 말처럼 어디에는 이 안좋은 기운을 풀어야한다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방금 어린이 백과를 봤는데 다른데에다가 하소연하지 말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데요. 우리나라는 어릴때부터 정의감에 대한 교육에 너무 세뇌를 시킨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이제야 정의감이 무엇인지 저는 알게되었는데 말이죠. 정의감이란 자신이 나약한 정신으로 인해 생기는 잘못된 이기심이라는 것임을 아직도 모른다면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살려고 해도 살지 못하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만 인식되어 살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싶은데 그렇게 하려고하면 자꾸 사회가 하나의 인간을 저 밑으로까지 끌어당겨줍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서 상처를 받고 평생 혼자 살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기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야합니다. 그래놓고 우리의 교육은 우리가 앞으로 해야할일을 두루뭉슬하게 이야기하면서 심심하면 남들의 아픔을 끌어안아주겠다는 거짓말을 하곤 합니다. 그 거짓말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굳이 그 거짓말로 인해 그 사람이 상처를 받을 것을 생각을 하면 제 시각에서는 미안하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의 레벨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 레벨이 높다는 것을 미화하거나 우대하는 것이 아닌게 그저 레벨이 다르다는 것도 코드가 다르다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신분이 높다고 한들, 삶의 레벨이 높다고 인정한다고 한들 아무렇지 않은 게 그것은 그때마다 코드가 있다는 것이며 그 코드를 읽을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삶에서 주어진 경험이 많을 수록 코드에 대한 가치가 사라진다는 것이죠. 반대로 코드를 못 읽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글을 쓸때면 항상 생각나는게 공자의 논어를 40살때 읽어야한다는 말이 왜 그런건지 합니다. 집에 논어 책이 있지만 읽지는 않았고 가끔 세상의 진리를 보고자 할때 펼쳐본답니다. 모든 글은 의미가 없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에게 코드로 작동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코드가 작동하는 것을 의심해야 합니다. 어제 겪었던 말도 안되는 상황이 작동하는 것은 분명 지구상에 떠도는 어떠한 선이 우리를 지나치게 되면 무수한 의심과 무수히 심오한 세계를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그 세계는 어디에서 왔으며 그 세계로 인해 내가 그들을 지배할 것이라는 의미없는 생각들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이후에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게 바로 객관적이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입장이기도 하며 자신이 그 사회적입장을 감내하기 위해 자신을 가둬두기도 해야한다는 스스로의 결정을 하게되는 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회적입장을 감내하기 위해서 진정 자신은 무슨일을 하였는가에 대해 생각해봤을때 그 흐름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 코드를 맞춰본다면 어느정도 정답은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코드의 역을 생각해 본다면 풀이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인데요. 내가 세상에서 들은 이야기로 인해 풀이를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풀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남이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남에게는 적용되지 않지만 나에게는 적용이 됩니다. 찰리 채플린의 명언 중에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 자신을 머리 뒤에서 바라본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제 3의 눈을 보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맹인도 막대기가 필요한 분이 있고 막대기가 필요없는 분이 있습니다. 제 3의 눈을 얼마만큼 훈련하느냐에 따라 감각이 어디에까지 미치는 건지 알 수 있게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중추신경에 전달되는 정보를 차단하는 훈련이 얼마나 됐는지에 따라 개구리가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는 파리를 잡아먹듯이 자신의 마음의 안정에 좋은 결과를 전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야기하기 힘들지만 겪었으니까 이야기해보는 건 어떻게 보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삶의 레벨에 따라 도움이 될수도 아니면 시간낭비가 될수도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호불호가 갈린다는 것 또한 분명 어떤이에게는 가치가 된다는 말입니다. 가치는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내기도 합니다만 그 가치가 새로운 가치로 변형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운명을 다른길로 인도하는 것 또한 사람이어야합니다. 그 경로가 바로 사람이 쓴 글을 통해서 열리게 되는 것이죠. 저 또한 분명 숱한 경험을 했겠지만 모두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경로를 통해 스스로가 결정하고 판단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죠. 세상에 모든 훌륭한 위인이 자기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유명한 연예인들의 기사를 보면서 그들이 말하길 거품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거품에 속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죠. 거품을 정제시켜서 비누로 만들 생각을 하지는 못합니다. 왜라는 이유를 찾게될텐데요. 그저 시간속에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회는 이미 찾아와있습니다. 기회를 잡으려고 한다는 말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야기합니다. 기회는 세상에 널려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 코드를 맞추는 일부터 진행을 해야한다는 뜻입니다. 아직 맞지 않는 코드로 세상을 비유하려하다보니 어긋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목표는 그저 이루어지지 않아도 되는 작은 예언입니다. 무언가가 이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중간에 무슨 코드가 작동한건지 알아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맞는 코드를 찾아내는 것이 방법입니다. 이게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끓어당길 수 있게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제가 삶에 경험에 있어서 겪었던 일을 어떻게 보면 철학으로 풀어낸 글이기도 한데요. '나는 겪었으니까 이야기해도 된다' 에 대한 포스팅의 취지는 너무나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나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분명 내가 살아가면서도 앞으로 또 볼지 모르고 그럴 확률은 많이 없지만 어제 처음으로 나와같은 경험을 한 사람을 직접 대화하게 되니 아직 저와 같은 단계를 뛰어넘지 못했을 것이며 수많은 고통이 그 분에게 찾아올 것을 알기에 이제는 그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글을 읽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이런 글을 읽어서 달라질 분도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우리는 한권의 책에서 수많은 코드를 읽습니다. 거기에서 사람 개인의 코드가 불일치하면 잠을 자게 되죠. 그럼 다른 책을 읽으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인해 말도안되는 레벨의 책을 열심히 읽다가 잠에 골아떨어지는 우리내 아이들을 보면 노력하는 마음에 가슴이 아프기 시작합니다. 잘못된 코드를 사람에게 삽입된다는 결과가 얼마나 아픈건지 저는 이미 알고 있기에 책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을 통한 습득의 코드는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아이에게 알맞는 코드를 습득하게 하는 환경조성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건데요. 아이가 모두 잘하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지금 그 코드를 저 먼길을 통해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만의 길이고 아이는 그 길을 몰라도 자연스레 알아가는게 좋습니다. 고통을 감내할 일은 그 아이 스스로의 책임으로 자라나게 만드시는게 좋은 교육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본래 가지고 태어난 능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또한 아이였고 아이는 부모가 되는것도 부모가 되지 않는것도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부모와 아이가 분리가 되는 과정을 도와주는게 부모로서의 역할인건 우리가 속어로 새대가리라고 표현하는 새가 새끼를 키우는 과정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녀석의 본능을 최대한 이끌어주고 스스로 떠나게 만듭니다. 그 선택은 단순한 것입니다. 원초적인 것에서부터 우리는 답을 찾는게 쉬운 정답이라고 느낍니다. 그 전에 무수한 생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포스팅을 제대로 작성하지 못하고 하루를 끝낼까봐 그랬지만 이런 날도 있겠지란 생각으로 어제 하루를 보낸 것 같습니다. 스마트 민방위 교육은 생활에 유익한 정보가 될 것 같아 회사에서 미리 작성해두긴 했었지만 스마트폰으로 글을 작성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심히 깨닫고 빠르게 글을 입력할 수 있는 키보드 시스템을 장착한 휴대성 편한 기기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론 스마트폰 중에 노트시리즈가 빠른 입력이 가능했었는데요. 그래봤자 스마트폰이기에 앞으로 많은 글을 포스팅을 쉽게 하려면 집에서 블로그 작성만으로는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틀만 잡고 집에서 수정하는 과정을 진행해도 되겠지만 한번에 빠른 창작으로 인해 얻게 되는 완성도가 훨씬 더 좋아보이더군요. 처음에 생각했던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되도록이면 한번에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봐야 겠습니다.


 연차지만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야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심오한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바보 아니면 천재일 겁니다.(하나마나한 소리겠지만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란 말이죠.) 최근에 어떤 신입분에게 제가 업무를 알려주기만 하면 천재소리를 하더군요. 입발린 이야기겠지만 실제로 저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하면서 삶에 임하고 있습니다. 천재가 모든걸 잘하는게 천재가 아닌 하늘에서 주어진 일을 그대로 하는 사람을 천재라고 하지요. 그 재능은 자신이 세상에 밝히기 위해서 주어진 길을 가느냐 안가느냐에 따라 불리우게 될거라고 생각됩니다. 모든 사람은 천재지만 천재라고 불리우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위한 길을 가는 것은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찾으세요. 그러면 분명 자신은 천재가 될 것입니다. 좋은 글일지 나쁜글일지도 모르는 이 글을 읽어주셨다면 정말 감사드립니다. 좋은 의견이나 질문이 있다면 항상 질문해주십시오. 성심성의 껏 답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이 보이지 않는 선에 대해 직감적인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자세히 이야기해 보고 싶네요. 

세상 살아가면서 계속 겪게될 현상인데 말이죠. 프로파일러가 말하는 범죄심리학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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